[아트리움 모리]나광호 개인전 <유월리 柳月里: 상상의 식물원>
<유월리 柳月里: 상상의 식물원>
상상의 식물원 -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생하는 존재들의 서사
신원정(미술사)
맨드라미, 질경이, 천인국, 에키네시아, 해국, 만수국, 피라칸타, 붓꽃, 데이지 – 유촌 창작스튜디오 2층에 위치한 나광호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사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꽃과 풀의 시각적 향연이 펼쳐진다. 캔버스와 종이에 물감으로 구현한, 다양한 크기와 색감의 식물 그림들이 전시된 공간은 그러나 꽃밭이나 정원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얼핏 실험실의 무균적 환경을 연상시키는 흰 벽을 비롯한 무채색 인테리어와 질서 있는 실내를 점거한, 특히 식물도감의 한 페이지처럼 보이는 작품들은(이미지와 라틴어 학명, 소재지 주소와 지리적 좌표, 식물의 특징을 요약한 키워드 등 텍스트를 결합한) 식물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공간의 인상을 자아낸다.
2022년부터 시골의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 이미지를 도감의 형식을 빌려 작품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나광호는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유월리에 위치한 아트리움 모리의 유촌 창작스튜디오 입주 후 큰 틀에서 기존 작업의 연장 선상이면서 새로운 장소적 특성을 가미한 ‘유월도감(柳月圖鑑)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등장한 소재는 ‘큰방가지똥’이다. 엉겅퀴와 혼동할 만큼 유사한 톱니 형태 잎새와 민들레를 닮은 노란 꽃이 특징인 국화과 식물로 큰방가지풀이라고도 불리는 큰방가지똥은 원산지가 유럽인 외래식물이지만, 길가나 빈터, 들판 등 우리나라 전역에서 흔히 보인다.
<큰방가지똥>을 그릴 때도 작가는 관련 정보(학명, 소재지, 프로젝트명 등)를 이미지와 나란히 제시한다. 기존 작품에서는 대체로 이미지가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하단에 손글씨로 작게 항목들을 적어 이미지와 텍스트의 엄격한 위계가 수직·수평의 기하학적 질서로써 드러났다면 이번에는 훨씬 유연하고 유기적인 화면이 구성되었다. 작가는 큰방가지똥 두어 줄기를 부분확대해 그린 후 여백에 이미지를 보완하듯 텍스트를 삽입했다. 상하좌우로 뻗어 나간 줄기 끝 꽃망울이 마치 화살표처럼 관람자의 시선을 텍스트로 이끈다. 작가는 여느 때처럼 군집을 그리는 대신 클로즈업하듯 개체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새하얀 화지에 수채화의 습식 기법을 활용해 강렬한 윤곽선과 드라마틱한 색감의 경계를 능란하게 표현해냈다.
식물도감의 형식을 차용하는 작업을 선보이기 전, 나광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전통적인 미술사 범주 내에서 실험성이 표출되는 양상을 보인다. 2000년대 중반의 추상회화 연작, 이후의 키네틱 조각과 대형벽화 작업, 2010년대 들어서는 서양 명작회화를 변용하여 유화로 재창조했던 작가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문득’ 주변에 널린 흔하디흔한 식물의 존재에 주목하게 되었다. 평소 무심히 보아 넘긴, 동물과 인간의 발 그리고 오토바이와 자동차 바퀴에 치이고 밟히면서도 꾸역꾸역 자라나는 이름 없는 풀들이, 이동이 잦아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던 그의 눈을 어느 순간 사로잡은 것이다.
그중 질긴 생명력을 뜻하는 질경이는 시골길뿐 아니라 도시의 인도나 차도 가장자리에서 흔히 보인다. 마차 바퀴 자국을 따라 자라난다고 해서 붙여진 차전초(車前草)라는 명칭처럼 인간과 긴밀하게 공생해온 질경이는 예로부터 한방에서 잎과 종자의 효능을 높이 사 약재로 사용했고, 민간에서는 잘 씹어 상처에 바르거나 직접 섭취하는 식으로 소염과 항균작용을 활용해 온 식물이다. 질경이의 존재에 무심코 주목하게 된 것처럼 작가는 맨드라미도 우연히 ‘발견’했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감의 꽃잎 때문에 주로 관상용으로 재배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의 눈에 띈 맨드라미는 울타리나 담벼락을 대체하는, 그야말로 기능적인 식물이었다. 하찮게 여겨지는 변두리에 존재하는 풀들 그리고 새로운 면모를 포착한 식물들을 작가는 사진 찍고 연구하여 조형화하기 시작했다.
나광호가 전유한 도감이라는 형식은 동시대 미술계의 주요 담론인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에서 인간 대 자연의 이항대립적 구조의 구축과 해체 모두와 연관되는 역사적 모티프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공한다. 서구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식물도감의 역사는 식물학의 역사와 다름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식물도감은 역사적으로 식물학, 더 나아가 약학과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식물의 모습을 기록하고 효능을 연구함으로써 인간은 주변 세계와 자연환경의 이해를 심화해 왔다. 그러나 과거의 식물 연구는 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본 유용성을 기준으로 이루어졌고 이러한 경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식물(자연)을 인간의 분류 체계에 끼워 맞추는, 전형적인 인간중심주의적 접근의 예인 식물도감을 나광호는 미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자신의 시각과 조형언어로 재창안했다. 가령 화면을 빽빽하게 채운 질경이, 부추, 천인국, 맨드라미는 유용성이나 심미성과 같은 인간적 잣대와 완전히 무관한, 게다가 개별 개체가 명확하게 구별되지도 않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단독으로 그려진 큰방가지똥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정교한 묘사나 에두아르 마네의 감각적 색채의 미술사적 전통과 공명하는 듯 보이며, 다소 삐뚤삐뚤한 손글씨는 불완전한 인간 존재의 흔적을 가시화한다(사실 초등학생인 작가 딸의 협업물이다).
단지 식·약용 연구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공생하며 환경 변화에 관여하는, 인간의 자연 개입을 암시하는 비인간 행위자로서 식물을 표현하며 나광호는 유화, 수채화, 다색 목판화, 실크스크린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다. 평면에서 입체까지 두루 능한 그의 작업에서는 특히 매체적 실험성과 독창적 확장성이 두드러진다. 유채와 수채물감 고유의 밀도를 반대로도 적용해 보거나 배접한 용지를 사용해 찍거나 다색판화에서 색과 층의 겹침에 느슨한 태도를 취하는 등 전통적인 매체의 틀에 갇히지 않고 비정석적(非定石的) 접근도 개의치 않는 실천은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개념과 부분적으로 결을 같이 한다. 기존의 물리적 지지체와 관습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고 통합하되, 궁극적으로는 회화성을 성취하는 작업 프로세스는 전통과 비정형성 사이에서 자유롭게 변주하는 동시대 작가로서 나광호의 예술적 정체성의 근간을 이룬다.
1) 고령화 시대를 맞아 성인병과 암 치료 및 특히 신체 노화 감속에 관심이 큰 현대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2010년대 후반부터 차전초의 학술 연구는 항산화 효능과 체지방 감소 효과에 중점을 두는 경향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