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ㅣ [아뜰리에 in 대구] 권기자 작가 "층층이 쌓인 물감, 곧 인생의 단면"
최근 찾은 권기자(63) 작가의 작업실은 도심 속에 있음에도 자연과 무척 가까운 느낌이었다. 대구 수성구 매호천이 작업실 바로 앞이어서 물 흐르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고, 해오라기가 날아와 먹이를 찾기도 했다.
작업실 마당의 커다란 뽕나무가 만든 그늘 아래에서는 작은 새들이 잠시 쉬다 날아갔다.
권 작가는 "2018년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꽃가루가 날리고, 열매와 잎이 돌아서면 떨어져있고, 풀도 뽑아줘야 해 보는 것만큼 낭만적이진 않다. 그래도 도시 속 오지 느낌이랄까. 조용하고 자연과 벗할 수 있어 작업하기에 좋다"고 말했다.
작업실에는 말린 물감 덩어리들이 가득했다. 색깔별로, 혹은 색이 뒤섞인 채 고무처럼 굳은 이 물감 덩어리들이 바로 작품의 주재료다.
그가 말린 물감 덩어리를 사용하게 된 건 2018년 남구 이천동에서 지금의 작업실로 이사하던 때, 우연한 발견에서였다.
그는 "캔버스를 세워 놓고 아크릴 물감을 흘려 작업하는 방식의 'Natural' 연작을 해왔다.
캔버스에서 떨어진 물감들이 바닥에 그대로 겹겹이 쌓인 채로 굳었는데, 버리려고 떼내니 너무 예뻐보였다"며 "뭉쳐져있는 덩어리를 칼로 잘라 단면을 펼쳐보니 신세계가 펼쳐졌다"고 말했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물감의 층층마다 그가 작업해온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있었다. 작가의 수행과 그 시간을 담은 물감 덩어리들. 그것이 '시간의 축적(Time accululation)'이라는 작품의 시작이 됐다.
"표면이 불규칙한 면에 물감을 뿌리고, 어느 정도 딱지처럼 굳으면 떼어냅니다. 혹은 다 쓴 물감통에 묻은 물감을 그대로 말려 떼어내기도 합니다. 제각각의 두께를 가진 이 물감 덩어리들을 손으로 돌돌 말거나 아무렇게나 뭉치죠. 그것의 단면을 잘라내 틀에 넣고 또 말립니다. 다양한 결이 생긴 단면들을 캔버스 위에 조합해 붙인 뒤 또 굳히면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물감 덩어리가 품은 단면층을 내보이는 그의 작품은 다양한 색감과 형태가 뒤섞여 있다. 때로는 소용돌이 치고 때로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내는 모습이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는 "무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나올 때가 많다. 의도를 갖고 작업하지만, 어느 정도 우연성을 구현하는 신의 영역은 있는 것 같다"며 "처음에는 듬성듬성한 부분이 많지만 그걸 메꿔가며 결국에는 매끈한 느낌으로 완성하게 된다. 삶도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다듬어지고 성숙해진다는 점에서 작품과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물감 뚜껑에 묻은 물감을 그대로 말려 뜯어낸 덩어리, 벽에 물감이 튀는 걸 방지하려 쳐놓은 비닐에 흘러내려 굳은 덩어리들도 입체 작품의 소재가 된다.
이같은 입체 작품들은 오는 10월 15일까지 성주 아트리움모리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물감의 층리, 시간을 조형하다'에서 다수 만나볼 수 있다. 그는 "물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벽면에서 탈출하는' 설치 작품들을 앞으로 많이 도전해보고 싶다"며 "평면회화만 하면 답답한 느낌이다. 무한한 공간으로 끄집어내려는 시도를 차츰 늘려가려 한다"고 말했다.
내년 베니스비엔날레 60주년 특별전에 초대된 그는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할 예정이라고 했다.
"다들 내게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작가라면 죽을 때까지 새로운 걸 추구하고, 치열하게 작업에 몰두하며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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