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빛나 개인전 <A씨의 정원>
<A씨의 정원>
성속(聖俗)의 회화적 변용
김현주 (독립큐레이터)
그 여인은, 그 여인은 몸을 숙인 채 두 손에 얼굴을 온통 파묻고 있었다. 노트르담 드 샹 거리의 모퉁이에서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불쌍한 사람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면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 그들에게 무슨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으니까.
최빛나는 인도 유학 시절 자전거를 타고 길모퉁이 골목을 돌았을 때 마주친 잘 가꿔진 아름다운 정원 이야기를 했고 이를 그렸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연상되는 광경은 사뭇 입체적이었다. 아름다운 정원, 늘 그곳 정원을 가꾼다는 무표정한 주인 남자, 자전거를 탄 여인, 그리고 마치 그곳에서 이 모두를 바라보는 듯한 나. 그런데 최빛나의 회화는 연상과는 대조적으로 평면적이다. 회화 앞뒤로 너울이 높고 크지 않고 따스하고 몽롱한 온기가 회화 표면에 딱 잡혀서 순간 응결된 듯 보인다. 마치 꿈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표현할 때의, 그런 연상(聯想)으로 이루어진 회화라고 말하고 싶다. 참고로 작가는 자신이 상상의 풍경을 그린다고 한다. 『상상력』에서 이미지는 물질이 아니라 의식의 한 유형이라고, 이미지는 하나의 행위이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고 말한 사르트르의 언급을 다시금 상기해 본다. 최빛나의 회화는 결과로 눈 앞에 자리하기는 하지만 회화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행위이자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결국 최종 물성을 보는 것에 그치기보다 생각이 고개를 들길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 봄날 같은 이 회화에 기울인 붓질을 빗대어 말하자면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걷는 『말테의 수기』 속 인물에 다다른다. 불쌍한 사람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이를 가엾이 여겨 짓는 낮은 움직임. 동정이나 시혜로 호들갑 떨지 않고 자분자분 전하는 감응의 상태. 예를 들면 최빛나의 〈The Night〉(2017)는 인도 북쪽 사과밭이 많은 동네에서 모든 개가 울부짖었던 어느 밤 사건을 담았다. 개 한 마리가 바닥에 온통 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을 때 온 동네 개들이 울부짖었던 밤이다. 애가(哀歌)는 핏빛 처절함만으로 표출되지 않고 세상이 그렇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한 그 밤 화면 어딘가 붉은 붓질의 편린으로 대신됐다. 삶에 매듭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지을 수 있을 때가 있다.
때때로 매듭은 중간 결절 같다. 최빛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싶은 그 무엇에 대해 ‘중간계’라고 말했다. 비의(秘儀)처럼 들리겠지만 그 세계에 대한 믿음이나 기대가 투영된 의미이지 않을까? 중간계. 일본 영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두 번째 장편영화의 제목은 《원더풀 라이프》(1999)다. 영문 제목은 After Life로, 이 제목이 영화 내용에 더 직접적이다. 천국으로 가기 전 머무르는 중간역에 도달한 이들은 숙제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골라 영화화해야 한다. 그 순간을 기억해서 영화로 재현한 이들은 상영이 끝나 불이 밝혀질 때 중간역에서 사라지고, 소중한 기억을 고르지 못한 이들은 그곳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다. 소중한 기억은 장면, 즉 이미지에 가깝다. 이미지는 의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a씨의 정원〉을 본다. 4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진 연작은 흩어지고 흘러내린 샛노란 물감 무더기 위에 듬성듬성 자라난 꽃 더미와 이 더미 주위로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들이 얹어지고 숨어 있는 장면으로 연출되어 있다. 자전적인 출발점은 그이의 속내로 아껴두고서 회화를 서성여본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란색의 정원이 무너지면서 꽃이 사라져간다”라고 했다. 그녀와의 만남에서 꽃이, 나무가, 문이 실체가 있는 것들인가 물었는데 이에 대해 꼬박꼬박 답―대체로 실제 본 광경들이었다―은 해주었지만 느낌인지 몰라도 그게 왜 중요한가요? 라는 의문을 갖고서 답하는 듯했다. 말하자면 그것이 이것이라는, 그런 대입에 딱 들어맞는 재현 아닌, 연유하는 처는 있지만 도달하는 처는 정해놓지 않은 여정 중에 그녀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앞서 자전적인 출발점은 있다고 짧게 언급했는데 회화 군데군데 자리하는 이미지들도 수목장의 조화, 난개발 중인 경기도 용인의 용도 불분명한 문, 집 뒷산 가로등과 같이 가까이에서 출발해서 어느 순간 뿌리째 뽑혀 비/초현실적 레이어로 회화에서 부유하게 된다.
이처럼 분명 아름답고 정치한 회화임에도 회화 그 자체만을 즐기기에는 최빛나의 과업은 진중해서 무겁다. “내가 살고 있는 삶 너머에 무언가 있다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상상하고 표현할 것인가?” 그녀의 회화는 이 물음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행위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배경에는 유학 시절 무더위에 몸을 피해 도서관에서 탐닉한 페르시안 미니어처 회화가 자리한다.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회화의 요소에는 십수 세기 동안 전승된 문자, 꽃과 나무 모티브, 기하학적 문양을 습작하고 변용한 특이점이 반영됐다. 겉보기에 장식적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유구한 역사에서 성(聖)과 속(俗)을 집약시켜 도안으로 세밀하게 묶인 페르시안 미니어처 회화에 느낀 매력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번안되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최빛나에게서 보이는 세밀한 표현은 그 밀도를 높이면서도 그 외연에서 쳐 낼 요소들은 과감하게 걷어낸 선택과 집중의 역사를 내면화했다. 한편 판화를 전공해서 익힌 작업의 과정은 우연의 요소가 발휘되는 작업 초반 단계에서 점차 각각 다른 판들을 얹어 찍어 올리는 판화 공정의 체계를 닮아갔다. 몇 해 간 작품에서 판화 기법이 주되게 부각되지는 않았으나 판화로부터 배운 설계가 작품의 효율을 높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페르시안 미니어처 회화나 판화 기법으로부터의 배움은 회화의 형태와 공정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회화의 주제에도 영향을 끼친다. 〈알과 돌〉(2024)과 같은 회화는 유추를 거듭해서 의미로 향하게 만들지 않고 과녁을 향해 직접 타격하고 있다. “연약한 것과 무거운 것. 깨어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는 언급은 일차적인 형상과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교묘하게 둘 사이 의미의 역전에 대해서도 반문하게 만든다.
다소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겠으나 성주 작업실에서 찾은 작업 변화의 단서에 대해서도 짧게 거론하고 싶다. 벽면 가득 빼곡하게 들어찬 직접 찍은 사진들과 여기저기서 찾은 참고 이미지들을 보며 그간의 최빛나와 앞으로의 최빛나 사이를 이룰 어떤 조짐을 찾은 것 같다. 지금까지도 물론 대체로 실제 본 광경들이 연쇄를 이루며 상상의 풍경을 이루어왔지만 “이제는 조금 더 멀고 넓은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싶다고 했다. 회화 표면에 순간 응결된 의식에서 점차 융해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the place-계절1〉(2024)을 연구하던 시점에 만났다. 작업실 근방에서 찾은 생경한 풍경을 마치 화분에 옮겨 심듯 들여와 늘여놓고 또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은 맹아일지 모르겠으나 회화 앞뒤로 더 큰 너울짐을 예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낯선 곳은 내 몸의 용처를 다르게 만든다. 상상의 내용을 달리하고 감각과 정서, 의식의 우선순위를 뒤섞게 이끈다. 최빛나가 생각에 잠겨 있을까 봐 발소리를 줄여 조용히 걷기로 한다. 불쌍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고독한 결정을 거듭해야 하는 이이기 때문이다.
1)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김용민 옮김, 책세상, 2005, p. 13.
2) 장 폴 사르트르, 『상상력』, 지영래 옮김, 기파랑, 2010, p. 228.
3) 이하 큰따옴표 옮긴 부분은 최빛나의 말과 글에서 인용한다.